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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의 현장/책

표백된 세계와 명징한 의도, 『천 개의 파랑』

내돈내산

 

정말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모르겠는데.. 일단 읽었으니 이야기를 쓰겠다.

 

나는 어떤 장르든 작가가 현실을 관찰하지 않으면 좋은 이야기는 쓸 수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현실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 때는 어쩔 수 없이 작가가 인지하는 현실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책을 읽으면서 고통을 느꼈다. 세계가 참 작위적이다. 작가는 경마 이후에 버려지고 죽임당하는 경주마들을 통해 인간이 이 세계에 가하는 고통과 사디즘적 측면을 보이려고 한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는 작가가 훨씬 가학적이다. 오로지 그 고통을 돋보이기 위해 너무나도 이상하고 말도 안되는 현실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 고통만을 위해 실재하는 고통을 대상화하고. 

 

휴머노이드 기수의 칩이 박혀야할 로봇에 학습 칩이 들어가버려, 콜리는 이상한 로봇이 된다. 읽는데 자꾸 바이센터니얼맨에서 딱 그런 로봇을 연기한 로빈 윌리암스가 생각났다.. 하여간.. 이 어색한 존재는 말들이 경주마로서 혹사당하다가 더 달릴 수 없게 되면 죽는다는 정보를 얻고 말 위에서 스스로 떨어져서 짓밟히는 사고를 벌인다. 

 

꽤 많은 사람들이 경주마의 약속된 죽음에 얽혀있다. 문제는 그들의 행위가 실질적으로 경주마를 살리는 것과 아무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하든, 그 행위를 전시하기 위해 말도 안되는 거래(이것도 곧 쓰겠다)를 성립시키고 그래서 2주의 시간을 벌어 최후의 경주장에 나오는 것이 이 말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각자 그 말의 정해진 죽음이라는 사건을 두고 자신들이 벌이는 행동에 지나치게 취해있다. 이것은 TV 동물농장에서 고통받는 동물들을 전시해서 그것을 보고 훌쩍훌쩍 울고 나서, 아, 나는 동물을 정말 사랑해. 하는 삶과 무엇이 다른가?

 

이 세계의 인간의 시급은 15000원에 이른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이 세계가 먼 미래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아르바이트 시장에 들어갈 때 시급이 4580원이었다. 2011년도의 일이었다. 10년 지났는데 시급이 8720원이다. 중간에 사회주의 대혁명이 일어나 최저임금위원회에 들어오는 사용자들 머리에 구멍이 뚫리지 않은 이상 우리 사회가 시급 15000원에 도달하는 날은 없을 것이다. 중간에 어떤 일이 일어났든, 대한민국의 시급이 만오천원이 되었다. 그리하여 편의점 사장은 점원 역할을 하는 휴머노이드를 쓴다. 길은 환경미화원 대신 로봇이 치우고.. 근미래를 다루지만 상당히 먼 시대가 배경인 책이다. 

 

은혜는 일곱 살이 되던 해 척수해 폴리오바이러스가 침범하여 수족 마비 증상이 일어났고 끈질긴 치료에도 불구하고 결국 척수성소아마비로 두 다리를 쓸 수 없게 됐다. - 81쪽

 

......

 

말 위에는 로봇이 타고 시급이 15000원이고 길가의 쓰레기조차 로봇들이 치우는 미래에... 이미 백신이 개발되어서 전 세계적으로 맞추고 있는 소아마비가, 심지어 생후 2, 4, 6개월에 걸쳐서 맞고 6세에 한 번 더 접종하는 그 병이 저 인물에게 발병한거다. 이거, 부모가 안티백서니까 지독한 아동학대로 고소당해도 할말이 없다...... 나는 이 인물에게 왜 굳이 이런 말도 안되는 설정으로 장애를 부여했는지 모르겠다. 

 

https://www.khan.co.kr/world/mideast-africa/article/202008261849001

백신 있어도 긴 투쟁…아프리카, 24년 만에 소아마비 종식 선언

 

2020년 8월 26일에 나온 경향신문의 기사다. 

 

오버워치를 보자. 많은 인물들이 기계의수와 의족을 쓴다. 강철의 연금술사의 주인공은 팔과 다리가 하나씩 없지만 오토메일을 달고 살아간다. 그래, 당연히 이 세계에도 그런 기술이 있다! 생체적합성 의족이라는 기술이 있는 것이다!

 

어머니, 이게 비보험이거든요. - 173쪽

 

...그래. 비보험일수도 있다. 그런 순간들이 꽤 많으니까. 하지만 솔직히 나는 이 인물이 성립할 수 없는 불행을 전시하고 소비한 죄로 작가 고소해도 할 말 없다고 생각해. 

 

 안경이 아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도수가 있는 안경을 착용한 사람은 도태된 자로 취급되었다. 그렇지만 주원은 안 했다. 아니, 못 했다. 유전성 질환인 푹스내피이상증으로 각막내피세포의 감소가 일반인보다 몇 배는 빠르다는 주원은 수술을 받을 수 없었다. - 179쪽

 

이 인물이 학교에서 마음을 연 친구는 안경을 쓰고 다니는 남학생이다. 이 세계는 15세가 되면 렌즈삽입술 (시력교정술인 ICL이 맞다.)을 시술 받는데, 그것이 보편적인 현상이 된 까닭은 이 나라에서 렌즈삽입술을 보험처리 해주기 때문이었다 (!!!!!!!!!!!!!)  

 

아, 그러니까 이 나라는 지체장애인의 자활과 사회복귀를 돕는 생체적합성 어쩌고는 비보험이면서 미용시술 이상의 가치가 없고 심지어 청소년들에게는 권장되지 않는 (라식, 라섹도 성인이 되어야 하는 마당에..) 제일 비싼 시술인 렌즈삽입을 보험처리를 해준다는 거임????????????? 이런 세계를 만들어낸 의도가 무엇일까? 장애는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 남학생은 미국 가서 비싼 수술 받고 온다. 그래서 저 인물은 엄청 상처받고 홈스쿨링으로 전환하고. 도대체 이 설정이 '불행 전시' 이상의 가치가 있는가? 나는 오히려 읽으면 읽을수록 이 작가는 장애와 약자와 그런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느꼈다. 

 

이 주인공이 소속된 가정은 꽤.. 싸늘한 편이다. 소방관이었던 아버지가 구조활동 중 낡은 보호구 때문에 죽게 되고, 어머니는 남편의 사망보험금(사기업에서는 소방관은 보험가입도 안된다는데.. 어느 회사에서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것도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으로 집과 음식점을 열었다. 그 돈으로 딸을 위해 생체적합성 의족을 맞출 수 있었지만 어머니는 집과 생계수단으로 썼고, 그 과정에서 어머니와 첫째딸은 소원한 관계가 되었다. 그리고 둘째는 언니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고, 많은 것을 홀로 견뎌야 했다. 그 과정에서 언니를 돌봐야 했다....... 아직 애기였는데....

 

https://www.mohw.go.kr/react/policy/index.jsp?PAR_MENU_ID=06&MENU_ID=06370406&PAGE=6&topTitle= 

 

정책 > 장애인 > 장애인서비스 > 장애인활동지원사업 내용보기 | 힘이 되는 평생 친구, 보건복지

장애인 장애인활동지원사업 목적 신체적 · 정신적 사유로 일상생활과 사회생활을 하기 어려운 장애인에게 활동지원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지원하고 가족의 부담을 줄여

www.mohw.go.kr

2021년 한국에는 이미 이런 제도가 있다. 장애인활동지원사업. 이 진짜 환장하고 병든 가족관계 구성을 위해 작가는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보호망을 없애버렸다. 그와중에 최저임금이 15000원인데 지체장애인의 자립계기가 될 수 있는 생체적합성 어쩌고는 비보험이고 15세 청소년들에게는 ICL이 보험이 된다. 이 세계는 정말 작위적이고 사람을 열받게 한다;;

 

이 둘째가, 머리가 좋다. 그래서 부잣집 아가씨랑 으쌰으쌰해서 아이템을 개발한다. 그게 나는 머슬 휠체어라고 이름 붙였는데, 작품내에서는 더 그럴듯한 이름이 있다. 하여간., 아, 소프트휠-체어네. 

 

문명이 계단을 없앨 수 없다면 계단을 오르는 바퀴를 만들면 되잖아요. - 338쪽.

 

아니!

문명이라면 계단을 없애야 한다!

 

그리고 여태 짜놓은 세계는 장애인들의 자활은 비보험이고, 시력 나쁜 청소년들에게 라식, 라섹도 아니고, 하다못해 드림렌즈도 아닌 렌즈삽입술을 보험으로 제공하는 국가다! 기껏 개발해서 상용화에 성공해도 그것이 보급될 수 없는 세계다!

 

무엇을 위해 장애인 이동권 보장 시위를 하는가? 무엇때문에 '정상인'들은 '비장애인'들이 되었는가? 왜 병신과 애자라는 말을 쓰면 안되는가? 유니버셜 건축 디자인은 어디에서 왔고, 지하철역의 승강기는 왜 놓아졌으며, 저상버스는 어째서 보급되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 전장연 사람들이 휠체어에서 떨어지고 휠체어째로 묶이면서 시위하고 있는가? 동시대에서조차 뒤떨어진 이야기가 'SF'랍시고 팔려도 되는 것인가?

 

『천 개의 파랑』은 아주 폭력적인 세계다. 아름다운 말로 꾸민다고 그 폭력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니다. 폭력을 제거한다고 그 세계가 폭력적이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천 개의 파랑』은 적극적으로(작법 스킬로서가 아니라, 누구도 상처입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폭력을 들어내고 은폐함으로써 오히려 세계의 부조리함과 폭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모순적이고 자가당착적인 소설이다.

 

마지막으로 경주마로 다시 맞추자. 우리는 느리게 어쩌고하는 연습을 해야한다는데, 이건 이미 등장인물들의 자기연민이 말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것 뿐이다. 자, 이제 뛸 수 없을 정도로 아픈 말이 어떻게 출전하게 되었는가. 

 

방송국 PD인 사촌 오빠가 몇달동안 모은 승부조작 고발 파일로 거래를 해서... 출전한 것이다....

 

당신이 지금껏 고액베팅 하는 경마꾼들을 상대로 돈을 받고 승부조작을 한 증거입니다. 이 자료는 다음 달 특집으로 방송될 예정이고요. - 265쪽
투데이의 출전만 승인해주시면 언론보도를 막을 수 있어요. 괜찮지 않아요? 고작 말 한마리가 뛰는 걸로요. -266쪽.

 

 

나는 진짜 모르겠다.. 이런 세계 어디가 아름다운걸까. 이 말도 안되는 세계가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으면, 그 사람들은 도대체 어느 현실에서 살고 있는거지?

 

아 진짜 지독한 책이다... 자신이 소재로 삼은 대상에 대한 예의도 없고 이해도 없고...

 

이 소설은 약자와 선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은 작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줄 요약 :  TV동물농장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