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곽재식'하면 작품보다는 '곽재식 속도'가 먼저 떠오른다. 그러니까... 글 빨리 쓰는 사람인 것은 유명한데 정작 무슨 글을 쓰는지는 잘 모른다는 거다. 요즘은 다양한 경로로 뵐 수 있는 가장 유명한 SF 작가이지만.. 익명의소비자에게 이분은 '무엇을 썼다'는 사실보다 '글쓰는 속도가 빠른 작가'로 인지 된다.
※ 곽재식 속도란? (참조: 리디 곽재식 작가전) 6개월에 단편 4개를 쓰는 곽재식 작가의 집필속도를 이르는 말. 곽재식 작가 본인은 2 곽재식 속도로 쓴다고 한다. |
SF 작가들이 항상 곽재식 작가의 작품을 주의 깊게 보기도 하고, 사실상 대부 같은 느낌. 말하자면 어째서인지 한국 SF 씬을 이해하려면 봐야하는 작가로 여겨진다. 그래서 익명의소비자도 한--참 전에 곽재식 작가전에서 대여한 '소행성 충돌, 이번에는 다르네'를 읽어보았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글쓰는 속도와 글의 수준, 퀄리티는 정비례하지 않는 소양임을....
곽재식 작가는 한국 관료제를 비꼬는 블랙 코미디를 특기로 내세우는 작가다. 블랙코미디로 밝고 유쾌하게 사회문제를 지적(곽재식 작가전-곽재식 작가 인터뷰 페이지 참조)하려는 의지와는 달리, 소설에서는 주로 관료제를 향한 독기어린 원한, 분노, 불신만이 느껴진다. 그 원한이 너무 커서 이야기를 뭉개버린다.
그리고 곽재식 작가가 인지하는 사회문제란 무엇인가? 이것 역시 소설만 보고서는 알 수 없다. 작가가 인지하고 폭로하고자하는 사회문제는 관료제인가, 강남 땅값으로 인지되는 한국인의 욕망인가, 아니면 대책 없이 떠넘기기만 하는 정부 부서들인가? 사회문제를 묘사했다고 하기에 소설은 지나치게 일방적이다. 작가는 소설의 욕망을 타자화한다. 강남 집값, 땅값이 어째서 그렇게 비싸졌고 왜 인간들이 집값에 매이게 되었는지는 이 소설의 핵심적인 욕망이다. 이토록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욕망은 소설의 비약적인 결말을 위한 재료로만 쓰인게 제일 안타까운 부분이다.
'나쁜 것을 나쁘게 묘사하는 것'은 쉽다. 쉽기 때문에 게으른 작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행성 충돌, 이번에는 다르네'는 게으른 소설이다.


소설은 시작부터 꼬여있다. 한국, 그것도 강남 땅에 소행성이 떨어질 것이라 관측한 쪽이 미국과 중국이다. 그런데 그 정보가 가장 먼저 주인공이 일하는 연구실로 들어온다. 그리고 어떤 연구실도 소행성이 한국에 추락할거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행정부처는 제대로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한국은 무려 미군 기지가 곳곳에 있고, 미국은 그 안으로 탄저균을 배송하는 무시무시한 실험을 하는 나라다. 옆나라 중국과 우리집 마당에서 텐트치고 사는 미국이 소행성의 경로를 아는데 어째서 우리만 모른단 말인가? 그리고 어째서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어째서 주인공은 그들을 설득시키지도 못하는가? 그들은 결코이런 제도의 피해자가 아니다. 이들만이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것도 속 터지는데, 어째서 이들은 누구도 설득시키지 못하고, 설득할 의지도 없었는가?

하여간 우여곡절 끝에 과학부 장관을 만나는데 과학부 장관은 뭐 해결할 의지 당연히 없고, 아무 의미 없는 말을 마치 '고도를 기다리며'에 등장하는 럭키처럼 쉬지않고 다섯 번을 쏘아낸다. 그런데 그 모든 말에 정보값은 하나도 없고, 이야기와 이어지는 것도 없다.
애초에... 도대체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지 설명도 안된다. 소행성이 지구에 떨어진답디다! 하니까 저런 말을 다섯 번이나 걸쳐서 한다....... 장관들의 전문성 없는 모습을 비꼬고 싶었는지, 원고 글자수가 부족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연구소에서 일하는 과학자나 되어서 누구도 설득 못 시키는 주인공을 보면 그게.. 소설 세계의 누군가를 탓한 계제인가 싶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서울 강남에 소행성이 떨어질 것'이라는 중요한 정보가 너무나도 뒷부분에 제시 되어있다. 아니, 그렇게 중요한 정보를 왜 처음부터 말을 안했어? 딱 첫장면에서 '강남에 소행성 떨어진다는데요' 하면 지금 얽힌 모든 사람들이 전화 폭탄 넘기기를 했을지, 과학부 장관이 뇌절에 5절까지 했을지,... 하여간 모든 캐릭터들의 태도가 변할 가장 중요한 정보를 너무 늦게 뱉었다. ...진짜로 알아야할 정보를 빼고 여기저기 문의하고 다녔으니 행정부에 국방부에 기상청에 과학부까지 가는 거 아니겠냐고..... 이건 전화 받은 공무원들 사정도 반드시 들어야 한다. 전화 응대 해준게 다행일 지경이라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작가는 가볍고 유쾌한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쓰인 글이 사회문제를 진지하고 어두운 글보다 사회 문제를 잘 지적할 수 있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에 항상 사회 문제를 넣을 필요가 있을까? 왜 사회문제를 소설로써 지적하려고 할까? 왜 소설에는 사회 문제를 지적해야한다고 생각할까? 그렇다면 곽재식 작가가 인지하는 사회문제는 도대체 무엇일까?
우선 공무원들의 깝깝스러운 일처리는 아닌 것 같다. 공무원이 사회 문제인가? 그들의 프로토콜이 사회문제인가? 그것이 문제라면 왜 마지막에 강남 전체를 대폭파 해야했는가? 한국 사회 특유의 부동상 투기 광기를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왜 굳이 운석 폭탄 돌리기 게임과 과학부 장관의 장광설을 넣었어야 했는가?
코미디에서 이야기과 진행을 비약시켜 엉뚱하게 끝내기 위해서는 앞선 장면들이 개연성과 정합성을 지켜주어야 한다. 코미디의 비약은 치밀한 논리 끝에 가능한 것이다. 가장 비논리적이고 황당한 엔딩을 내려면 그만큼의 밑작업만큼은 꼼꼼하게 해야했다.
소설은 아무 것도 비판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까기 위해 만들어진 세계에서 까기 좋게 설정된 허수아비를 비판하기 때문이다. 그 안에 우리 사회 일부가 투영 되어있을지라도, 이 글은 아무 것도 비판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심지어 웃기지도 않는다는 게.. 안타까움을 배로 더한다. 이런 퀄리티니까 그 속도가 가능했던 것이라고.
한줄 요약 :
1/8 곽재식 속도로 떨어지더라도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글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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