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녀장의 시대의 작가는 이슬아 작가님이고, 소설의 주인공은 작가 이슬아입니다. 소설에서 작가 이슬아가 직접 쓴 책이라고 인용된 글은 이슬아 작가님이 '실제로 쓴 책'입니다. 그리고 이슬아 작가님이 출판사를 운영하듯, 작가 이슬아도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지요. 이 작품에서 이슬아 작가님과 '작가 이슬아'를 분리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그 연장선에서 소설 등장인물인 이슬아를 '작가 이슬아'라고 호칭하겠습니다. 비록 불호리뷰이지만 평소보다 정중하게 존대를 쓰며 적기로 했습니다.
리뷰를 쓰기에 앞서, 제목에 쓴 용어를 정의하고자 합니다.
1) 오토픽션(autofiction) 일반적으로는 작가의 삶을 기반으로 쓰인 소설을 말합니다. 아무래도 작가라는 존재도 사회적 삶을 사는 존재다보니, 오토픽션 속에는 본의 아니게 그(작가와 유사한 존재)에게 시련을 준 사람도, 그와 갈등한 인물도 실체가 있는 경우도 왕왕 있어 소란이 일기도 합니다. 2) 드림물 (dream+物) 드림물은 서브컬처, 2차창작 영역에서 쓰는 말입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최애캐'의 커플링이 '나'인 경우입니다. 비슷한 말로는 나페스가 있습니다. 나페스는 좋아하는 아이돌과 내가 사귀는 상상을 하는 것을 일컫습니다. 드림물은 섹슈얼한 관계를 포함하여 다양한 방향으로 창작 되는데, 최애캐와 나는 사귈 수도 있고, 사제관계일수도 있고, 고용관계일수도 있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작품 세계에 '나 자신(의 캐릭터)'을 밀어넣어 이야기를 진행하는 경우, 드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왜 저는 '가녀장의 시대'를 드림물이라고 정의내렸을까요?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어서요.. 진짜 판타지 세계에서 나페스를 하는 것 같아요. 부모님께 월급을 주면서 가부장답게 홀로 돈을 벌어오는 30대 여성, 있을만도 하고 제목에 걸맞는 참신한 컨셉이었어요. 그런데 이야기가 그 컨셉을 못 살려서 그냥 트위터하는 사람이 쓴 과몰입 나페스물이 되어버렸습니다. 트위터 많이 하시는 분들은 2022년 10월에 아직도 이 떡밥으로 소설 쓰는 사람이 있냐고 느끼실 것 같습니다. (일단 트위터에 정신을 백업한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전반부는 '아니 나페스도 정도가 있지 이렇게까지 나페스를?' 라며 이마를 팍팍 치게 만들고, 절반이 넘어가면 그냥 트위터의 페미니즘 썰(담론이라고 하기에는 소설에서 보여주는 이야기가 너무 단면적입니다)을 짧게 소설화한 느낌입니다.
작가하고 인물간 거리가 가까우면 이야기에 진실성이 강해지는데, 이슬아 작가와 '작가 이슬아' 가 거의 분리되지 않는데도 이야기가 맥아리가 없습니다. 제가 드림물이라고 한 이유도, 오토픽션이라고 하기에는 세계와 인물들이 허구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슬아 작가님은 작가 이슬아가 주인공인 '가녀장 드림물'을 썼다는 게 제 감상입니다. 소설 내 모든 것이 구라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아는데, 인물들이 실제 작가님과 작가님의 '모부님' 이름을 그대로 써가지고 차마 인물들에 대한 비판을 할 수는 없겠네요. 드림러 분들께 오해를 살까 덧붙이는데, 이 소설은 '맥아리가 없어서' 드림물이라고 하는게 아니라 '허구적인 세계에서 내가 주인공인 이야기'라는 점에서 드림물이라고 한 겁니다.
사실 주인공이 '이슬아'여도는 되는데, 굳이 작가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은 들어요. 꼭 '작가 이슬아'를 내세우지 않아도 '이거 작가 아니냐' 싶게 연출할 수도 있었고, 작가를 시키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더 현실성을 얻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일단 작가가 돈을 잘 버는 직업이라면 SKY 붙고도 문창과나 컨텐츠창작을 알려주는 학과에 가는 친구들이 많았겠죠. 작가가 돈을 잘 버는 직업이라면 예술인복지재단도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사실, 작가 한 명이 서울 내에서 대출을 끼고(글쓰는 작가에게 대출이.. 나옵니까..?) 2-3층정도 되는 단독주택을 사들여서, 부모님에게 집안일을 외주 주는 대가로 법정최저임금 이상으로 월급까지 줄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추기는 진짜 어렵다고 생각하거든요. 뭐 대출이자+원금, 부모님께 주는 법정최저임금(2022 법정 최저임금이 190만원가량이니까) 이상의 월급+보너스만 생각해도 못해도 달에 6-700만원을 꾸준히 벌어도 벅찰텐데.. 작가는 '꾸준히' 고소득 가능한 직종이 아니고, 이제 소설에서 그게 가능하게 하려다보니 좀 규격 외 슈퍼☆작가가 될 수 밖에...
'작가 이슬아'가 한달에 도대체 얼마를 버는지는 사소한 일입니다. 뭐, 열심히 사니까 그정도 벌 수도 있죠. 얼마를 벌든 상관은 없습니다, 스토리만 납득할 수 있다면. . . . 전반부는 독자 머리를 깨는 나페스의 향연(어떻게 자기 소설을 작중캐릭터가 쓴 글이라고 인용 할 수 있죠?? 너무 차원초월 드림물이라 머리가 한번 깨졌습니다)이라면, 후반부는 '트위터 사이다썰'입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사실 전지전능 가녀장인 '작가 이슬아'의 캐릭터도 아니고, 머리를 깨는 나페스도 아니고, 누가봐도 트위터 썰을 차용한 후반부 에피소드가 아니라 장편 소설에서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고,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약간 '짱구는 못말려'를 보는 기분입니다. 아직도 애니메이션이 제작되고 매년 크리스마스 에피소드와 신년 에피소드를 만들어도 짱구도, 짱구의 부모님도, 짱아도, 흰둥이도, 떡잎마을 사람들도, 친구들도 영원히 짱구가 5살인 시점에 멈춰 있잖아요.
엄연히 말하자면 긴 시간동안 '짱구는 못말려'는 각자의 서사와 이야기를 쌓아왔습니다. 처음 애니메이션으로 나온 짱구시리즈와 지금 짱구시리즈는 기본적인 관계에서 추가된 것도 있을 것도 새로운 인물도 생겼을 겁니다. 그렇다고 극장판 쪽이라고 하기에는 뭐... 중심 문제가 없고 해결되는 것도 없고 나아지는 것도, 나빠지지도 않아요. 이미 초반에 물샐틈 없는 가녀장 월드가 완성되었고, 주요인물들은 그 안에서 각자의 낙원에 도달했고, 가녀장도 뭐 딱히 큰 시련 없이 가녀장 노릇을 합니다. 작가로 월 700을 버는데.. 뭘 더 어떻게 열심히 살겠어요. 그런 이야기가 서른 다섯? 서른 여섯개 정도 주욱 나열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각 에피소드는 웹소설 한편 분량인데, 웹소설만큼 스펙타클하지도 않은. 작중에 안티테제가 전혀 없이..... 갈등은 끽해야 노브라로 생방송 토론회 하겟다고 PD하고 기싸움 하는 것 밖에 없고.. (그렇게 화려하게 말싸움을 했으면 끝까지 곤조있게 가든가....)
슬아는 남자 소설가가 쓴 책 한 권을 얼추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다. 반면 여자 감독이 만든 영화는 빠짐없이 챙겨봤다.(238쪽)
저는 작금의 여성작가들이 위에 인용한 소설의 한 구절처럼 '기묘한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다고 느낍니다. 시니컬하게 말하자면 '합리화된 게으름' 입니다. 사실 좋은 이야기는 특정 젠더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이 문장은 그런 점에서 지금 여성 작가들이 어떤 의무감을 가졌는지, 그게 왜 게으른 건지 보여줍니다. '남자 소설가'가 쓴 한권은 '얼추 흥미롭게' 읽었지만 '여자 감독'이 만든 영화는 '빠짐없이 챙겨봤다'고 하잖아요. 그 영화가 어땠는지 어떤 묘사도 없고, 평소에 어떤 작품을 만드는 감독인지 어떤 감상도 없어요.
제가 말한 기묘한 의무감 = 합리화된 게으름이 바로 이런 느낌입니다. 여성 창작자가 만든 창작물을 의무적인 느낌으로 소비하면서, 정작 그 창작물에 대한 감상은 없는데, 그 이야기에 대해 조금만 불호평을 남기면.. (이하생략) 그러니까 의무적으로 정형화된 여성서사를 만들고, 그것을 여자작가가 쓴 여성 서사이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소비하고, 여러 비평에 대해서는 차단하고, 그러니까 계속 그런 이야기가 나오고...그런 이야기가 상을 타고..
('정형화된 여성서사'가 뭐냐면 이전에 제가 치를 떨면서 쓴 세 편의 책리뷰를 추천드립니다.)
생방송에서 자기 꼭지가 도드라지는게 뭐가 문제냐면서 기세 좋게 싸우다가 결국에는 자의로, 자기 가방에서 실리콘 패드 꺼내서 착용하고 방송하는 건, 세상에 반항한 것도 아니고, 자신을 억누르는 사회 제도를 엎은 것도 아닙니다. PD는 방송국 임원과 '작가 이슬아' 사이에 낀 인간이고, 방송 이후 벌어질 일에 대해 책임은 있지만 문제될 일을 막을 실질적인 권한도 없습니다. PD가 '작가 이슬아'가 싸워야할 가부장적인 인간이고, 가부장의 권력이 있는 사람이었으면 그 상황에서 절절 매면서 부탁했겠습니까.. 그러니까 '작가 이슬아'는 자신을 억누르는 남성의 시선에 저항한 게 아니라 그냥 중간에 낀 직장인 하나 잡고 진상을 부린 거예요.
여자의 꼭지가 부끄러운 것은 아니지만 토론회 같은 프로그램에서 남자패널도 꼭지가 도드라지는 걸 본 적이 없는데, 공적인 자리에 노브라에 크림색 상의를 입는 것은 저항인지, 객기를 부리는 건지... 그래서 실제로 싸웠나요? 아뇨, '작가 이슬아'는 싸우지 않았습니다. 남성 패널도 브라를 안했다면서 패기있게 PD를 쪼던 주인공은 정작 방송시간이 되자 자신의 꼭지를 드러냈다가 곤란해진 다른 여성을 떠올리며 실리콘 패드를 붙이죠.. 결국 PD만 중간에 껴서.. 생방송 2-3분 전까지 아무 의미 없는 갈등을 한거에요. PD가 주인공이었으면 진짜 재밌었을 정도로요.
가성비 있게 사는 건 꽤 중요합니다. 하지만 저항은 가성비로 하면 안돼요. 순응하는 삶을 그리는 것도 분명 의미가 있지만 주인공이 '가녀장'으로서, 노브라를 실천하는 인간이라면 생방송 시작 시간을 미끼로 PD와 기싸움하다가 결국 자기가 챙겨온(저는 이부분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할 의지가 진짜 없었으면 안 챙겨왔을테니까요) 패드로 꼭지를 가리는.. 이건 순응이라기보다는 '가성비 저항'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진짜 비겁한 행위 아닐까요? 발등의 불떨어진 PD는 실컷 짓밟아놓고 엄청 곤란하게 굴지만, 정작 진짜로 토론에 노브라로 임했을 때 져야할 책임은 전혀 안 지게 되었잖아요.
저는 이런 비겁한 행동을 저항이라고 꾸미는 것이 문학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문학이라는 예술 분과가 그 너머를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순문학을 '등단문학'이라면서 자신이 쓰는 글과 명확하게 영역을 분리하고자 한다면, 최소한 자신의 글이 그간 '등단문학'과는 다른 세계를, 그들이 보여주지 않고, 보여주지 못한 세계를 보여주어야지 않겠어요? 더는 비겁한 행동과 졸렬한 마음이 저항이고 페미니즘이며 문학이고 예술로 기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 줄(한 문장) 요약
전업작가가 대출 받아서 집사는 방법이나
작가의 수익으로 부모 부양하는 법을 책으로 썼으면
나도 이 리뷰를 안 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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