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자들이 모두 여자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문단내_성폭력 해쉬태그로 수많은 작가들의 범죄행각이 드러난 이후로 남성 작가들에게 굉장히 실망했었기 때문이다. 2017년에는 김훈 작가가 '언니의 폐경'을 통해 '뜨거워, 몸 속에서 밀려나와' 라는 다시 없을 명대사를 남기는 것으로, 그들이 남성으로서 어떤 특권 속에 살았고, 아마 그 특권을 인식하거나 내려놓지 못하면 이전처럼 문학계의 메인스트림에 속할 수는 없을거라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니 12회 젊은작가상을 모두 여성 작가들이 타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남성 작가들은 도대체 무엇을 썼길래 상을 못 탄 것인가?!"
제안하건데, 젊은 작가상을 여3:남3 정도로 부문을 나누었으면 좋겠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남작가들이 도대체 얼마나 못 썼으면 단 한 사람도 입상을 못하느냐는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
소설은 어쨌거나 이야기다. 장면의 앞뒤가 이어져야하고,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합리화까지는 안하더라도 그가 왜 그렇게 되었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정도는 설명해야 얼개가 완성되는 것이다. 주인공이 '계약직' 행정사무 '보조'라는 자신의 직업으로는 '불가촉천민'이라고 모멸감을 느낄 수는 있지만 이유를 설명해야만 한다. 설명을 전혀 해주지 않으면 결국 화살은 작가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독자가 작가와 작품을, 작가와 인물을 겹쳐보지 않고 가상의 인물이기를 원한다면, 그래야만 하는 서술을 해버렸다면, 그 상황에 대해서 필사적으로 설명해야하는거다. '작가님 행정사무직 하는 사람을 불가촉천민으로 여기시나요?' 라는 의혹을 어느 작가가 받고 싶어한단 말인가? 안타깝게도 이런 거리두기를 실패한 작품들이 12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대상작에 대해서 할 말은 정말 많은데, 기본적으로 본인이 헤테로이면, 성소수자는 안 다루는게 낫다고 본다. 성소수자가 어떤 환상 속 존재도 아니고 실제로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일진대, 얄팍하게 '소재'로 활용하느니 안 쓰는 게 낫다는 소리다. 타인의 삶은 작가의 소설 소재가 아니다. 심지어 정치적-레즈비언의 도식으로 레즈비언의 이야기를 쓰는 건 레즈비언에게 상당히 무례한 처사가 아니던가? 남자를 사랑하지만, 남자를 사랑하는 건 자존심이 상한다 (이유라도 알려줘..), 그러니까 여자를 사랑하기로 했다. 여성과 노는 것이 행복하니까 나도 레즈비언이라고 외치는 사람들과 같은 결이다. 그리고 12회 젊은작가상에 수록된 많은 작품들의 세계관이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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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화 LESBINGO
나는 얼마나 여자를 사랑할까? | 에디터 | 튜드 디자인 | 데자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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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이 정말 해로운 까닭은 남성 '대신' 여성을 사랑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대체품으로 여겨지는 사람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되려 '장 피에르'와 이어지는 현실 세계의 대학교단의, 예술계의 성범죄자들의 묘사는 사실적으로 잘 그려냈는데 어째서 주인공은... 이런 인간이 되어버린 것인가. 여성 주인공은 남성 주인공에 비해 서사적 결백성을 요구당한다지만 진공 속에서 결백하고 옳은 여성상을 생산하는 것보다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성소수자를 전유하는 캐릭터를 보란듯이 내놓는 것은 해롭다. 성소수자는 누군가의 결백과 옳음을 증명하는데 쓰이는 도구가 아니다. 애초에 퀴어가 왜 도덕과 윤리를 보증하는 존재란 말인가? 결국 현재를 살아가는 퀴어에게 '바르게 살아야한다'는 압박으로 작동하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소설에서 이 사람이 퀴어이기 때문에 옳다고 묘사하거나 암시한 건 아니다. 인물의 설정으로 부여했는데, 하나같이 본인이 소재로 쓰는 대상에 대한 이해가 얕아서 안 쓰느니 못한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동성애가 힙해보이고 새로 발굴된 소재로만 보이니? 그럴 수도 있는데, 소재로 쓰기로 마음 먹었으면 좀 알아보고 써야할 거 아니야. 퀴어로 글을 써서 명예든 돈을 얻고 싶으면 그들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게 어려우십니까? 저렇게 정상성에 대한 욕구가 드글드글하면서 레즈비언의 서사를 정치적 레즈비언으로 전유하는 건, 결국 정상성의 테두리 안에서 레즈비언도 아니면서 레즈비언의 위치에 자신을 두고 싶다는 것 밖에 더 되나?
김지연 작가의 「사랑하는 일」은 레즈비언 커플의 서사를 다룬다. 그런데, 이제 성애를 부정하는. 역시 대상작과 비슷한 연장선상이다. 사귀는 중인 동거인에게, 심지어 그 동거인은 사귀는 관계에서 '섹스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더는 섹스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건, 그동안 사귀어온 상대에게 무슨 개같은 매너이며, 레즈비언이라기 보다는 에이엄브렐라 스펙트럼으로 재정체화한 것이 아니던가? 여자를 사랑하고 그 여자와 동거까지 하면서 사랑하는 이와 섹스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 사귀고 동거하면서 섹스 회수가 줄어들거나 없어질 수는 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섹스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건 너, 레즈비언이긴 했니? 싶은 것이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정상성이 지긋지긋해서 정상성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동시에 본인이 속한 정상성을 위협하는 것 같아 두려워한다. '내가 그래도 쟤들보다는 낫지'라고 생각하지만 정상성 궤도에서 튕겨나간 그들의 삶을 '자유롭다'고 동경하는 마음도 있다. 정치적 레즈비언은 그 모순의 총집합이다. 나는 남자 '대신' 여자를 '선택' 했으므로 언제든 정상성으로 돌아갈 수 있으며, 동시에 레즈비언으로 퀴어의 세계에 있다는 기분도 낼 수 있는 가성비 최고의 선택이다.
어떤 성별이기에 선하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 여자 중에서도, 사회적 약자 중에서도 유독하고 유해한 인간이 있다고 인정해야 그 다음을 논할 수 있는 것이다. 등장인물이 정치적 레즈비언일 수는 있다. 그러나 정레의 유해함에 대해 어떤 성찰도 없으면 결국 작가가 정상성에서 일탈하지 않는 안전한 영역에서, 말하자면 본인은 정상성을 포기하지 않는 상태에서, 정상성에서 일탈한 존재들의 이름으로 정상성을 비판하는, 그 비겁한 위치에 있다는 걸 드러내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사랑하는 일」이 일종의 부조리극인 줄 알았다. 과하게 부풀린 인물을 통해 어느 집단의 가식을 유쾌하게 폭로하는 소설인 줄 알았고, 나는 곧 너무나도 많은 기대를 했음을 깨달았다. 몇 달전에 한국의 로맨스판타지는 한국여성의 한풀이라는 글을 트위터에서 본 적 있는데, 한국 여성의 한풀이라는 점에서는 이 소설은 가히 정석이라고 할 수 있는 조형을 보여준다. K-장녀이자 레즈비언으로 핍박받는 '나'의 곁에 있어주는 소주 3병 불고도 스도쿠를 풀어내는 초인 '영지'가 있어 그 모든 핍박과 한을 뛰어넘어 할머니의 유산인 주택을 아버지에게 상속 받음으로서 안정적인 중산층 지위를 계속 유지하게 된다.
일종의 '사이다 서사'인데, 이건 탄산 빠진 사이다 서사에 속한다. 어떤 상황에서 속이 뻥 뚫릴려면 독자가 '저 새끼들 다 몰락해버렸으면 좋겠다' 이입할만큼 고구마를 먹여줘야 한다. 그런 기초적인 시공도 없이 주인공은 초인 영지의 힘을 빌어 계층도 유지하며, 사랑도 지킨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탄산 빠진 사이다처럼 설탕이 끈적이는 느낌만 입에 남을 수 밖에 없다. 어떤 것도 잃지 않고 (주인공이 잃은 것은 이전부터 제발 없어지기를 바란 것들이다) 상속으로 경제적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기반을 얻었으며, 비록 섹스는 거부하지만 다른 여자와 원나잇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넓은 마음의 애인과 함께 한다.
솔직히 이정도로 세상과 독자층의 욕망에 충실하게 봉사한다면, 순문학이라는 명칭과 그 명칭에서 오는 자부심 다 의미 없지 않나? 그들이 그토록 우습게 여기는 카카페의 장르-상업문학과 본인들이 쓰는 순-예술문학이 결정적인 부분에서 무엇이 다른지 스스로 입증 못하면, 그냥 카카페 장르문학으로 들어와도 되는 거 아닐까 싶거든.
여기서 다루지 않은 작품들에 대한 짧은 평.
김멜라_나뭇잎이 마르고
-맥락없이 장애인을 등장시켜 세상 모든 불행을 짊어지게 하고 그걸 살아가는 서사로 활용하는게 지긋지긋하다. 그거 아세요, 이런 류의 숭배는 또다른 종류의 혐오라는거.
김혜진_목화멘션
-이 소설이 왜 대상이 아닌지 모르겠다. 집주인 같은 캐릭터 자취 해봤으면 진짜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법함. 냉면 먹고 싶어짐.
박서련_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주제는 재밌었다. 롤천재 울엄마. 초반에 정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숨막히는 분위기 연출을 잘했다. 이 소설이 왜 대상이 아닌지 모르겠다2222
서이제_0%를 향하여
-영화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으면 하나도 이해가 안간다. 소설에서 영화 제목 대면서 묘사를 대체하는 행위를 금지시켜주세요.
한정현_우리의 소원은 과학소년
-문장이 탄탄하고 구조가 튼튼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장면 전환이 너무 잦아서 내용을 못 따라갔음 (;;;) 제일 난해한 소설이었다.
젊은 순문학 작가들의 윤리적 파산을 애통해하며,
한줄 요약 : 남자 작가들은 도대체 얼마나 못쓴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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